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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령 美변호사’ 주광일 “나이는 숫자에 불과… 포기 말고 ‘도전’하라”

7 investment 2025. 2. 1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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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검장·변호사 이어 시인까지
숱한 변신 속 ‘평생 학도’의 삶

69세에 워싱턴 변호사 따내
도전과 용기의 메시지 ‘울림’

‘주독’으로 살아온 법조인으로
“잣대 늘 공평한 사회 됐으면”

시대 일깨우는 시인으로 변신
‘봄날의 예감’ 통해 희망 노래

“제가 한국 나이로 70이 다돼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20년 전에도 사오정(45세가 정년)이니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있으면 도둑)니 할 정도로 먹고살기 힘들었고, 지금도 시국이 험하지만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릅니다.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십시오.”

여기 여든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배움과 도전의 끈을 놓지 않는 이가 있다. 바로 자신을 ‘평생 학도’라고 말하는 주광일 박사다. 그의 이름 앞에는 전(前) 고검장, 국민고충처리위원장, 변호사에 이어 시인까지 다양한 직함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정의하는 표현은 단순하다. 주 박사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평생 문학도와 법학도로서 사는 사람’이라며 “이 세상에 공부만 한 즐거움이 없다”고 말했다.

학문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그의 여정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왔다. 실제로 나이와 경력, 이 모든 것은 그에게 한계가 되지 않았다. 열이면 열 은퇴해 삶을 하나씩 정리해가는 황혼에도 그 어렵다던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딴 게 그 일례다.

평생 법과 학문에 매진하며 불굴의 의지로 삶을 개척해온 그는 지금도 여전히 도전과 변화를 이야기했다. 나이를 잊은 듯한 그의 도전 정신은 오늘날 삶에 힘들어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있다.

◆‘불가능이란 없다’… 69세에 美변호사 되다

“많은 이들이 놀라더군요. 어떻게 그 나이에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느냐고요.”

그의 이름이 세간에 더욱 널리 알려진 계기는 69세의 나이로 워싱턴DC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일이었다. 그에게 워싱턴DC 변호사 자격증은 단순히 또 하나의 자격증 취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바로 ‘도전’이다. 그는 “공부는 끝이 없다”며 “하면 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 깨닫게 된다”고 웃으며 말했다.

말은 쉬워도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 낯선 문화, 고령으로 인한 체력적 부담 등이 그를 끊임없이 시험했다. 하지만 그는 매일 새벽을 깨우며 공부에 매진했고, 결국 난다긴다하는 청년 수재들과의 경쟁 속에 합격률이 절반이 안 될 정도로 까다로운 워싱턴DC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자 중 최고령자였다. 60년 전에는 사법시험 5회에 22세로 최연소 합격했었다.

그가 미국 변호사 시험에 도전했던 이유는 단순히 자격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이 시대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바로 끊임없는 배움과 도전이다. 만나는 이들에게 ‘공부하고 도전하는 데에는 때가 없으니 무언가를 시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라’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다.

그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순간조차 기자들에게 “하루에 30분에서 1시간이라도 쭉 영어 공부를 해보라. 그렇게 하면 한 달에 30시간, 1년에 300시간, 30년 하면 1만 시간”이라며 지속적인 자기계발을 권했다.

그러면서 “시나 수필, 소설뿐 아니라 기사를 볼 때도 영어로 된 것만 읽었다. 이렇게 10년을 하니까 어떤 글을 보더라도 한국어처럼 막힘이 없었다”며 ‘1만 시간의 법칙’을 당장 행동에 옮길 것을 강조했다.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배움의 시작이라는 설명과 함께다.

실제 주 박사는 나이에 상관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국내에서의 학업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연수와 연구를 통해 다양한 법체계를 직접 경험하고 부딪혀왔던 그의 인생이 이를 말해준다. 주 박사는 “1974년 미국 유학 1년을 하고 1979년 서울대학교 박사 취득 이후 일본 게이오대학교 연수를 6개월간 갔었다. 당시 1년 연수를 다녀오면 반년 연수를 못 가고, 반년 연수 다녀오면 1년 연수를 못 가고 그랬는데 어떻게 둘을 다 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그를 한시도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 그 원천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를 알아보려면 그의 검사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공정과 정의를 향한 열정

“법이란 강자에게만 유연하고 약자에겐 딱딱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잣대가 늘 공평해야 합니다.”

‘주독(朱毒)’. 그의 또 다른 별명이다. 매사 엄정하고 공정한 기준이 단 한 번도 흔들리는 일이 없다는 이유에서 붙었다.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사회적 힘을 이용해 그에게 청탁하려던 이들에게는 검사 시절부터 모든 사건에 공정한 잣대를 적용하려고 노력해온 그가 마치 독(毒)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터였다.

그는 자신의 검사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권력에 휘둘리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주 박사는 “부탁이 와도 제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며 “한 인간으로 보면 많은 과오도 있었지만 공직을 수행하면서 공인으로서 검사 생활은 법과 원칙을 지켰다”고 강조했다.

그의 신념은 공정성과 투명성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법원 앞에 눈을 가리고 있는 정의의 여신을 들어 “재판을 받는 사람이 빈자인지 부자인지 강자인지 약자인지 상관치 않는다”며 “법이란 정직해야 하며 특정 계층이나 권력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힘줘 말했다.

그러나 이런 그를 향한 주변의 시기와 질투도 적지 않았다. 선망의 자리였던 검찰과장 자리에 있다가 일 년 만에 대구지검 특수부장으로 ‘좌천’된 것. 그때 그가 “자신에게 무슨 과오가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주 부장은 개인의 명예가 너무 많아 찬물을 먹어봐야겠어”였다. 그렇게 청주지검(차장검사)과 부산지검(동부지청장) 등을 넘나들며 많은 굴곡을 겪었으나, 대쪽 같은 성정으로 대검찰청(감찰부장), 법무부(법무실장), 인천지검·서울고검(검사장)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는 “그래도 인사권자들이 자신을 알아줘서 승진할 때 단 한 번도 누락된 적이 없었다. 다만 서울보단 지방으로 돌았으나, 그 바람에 책 한 권이라도 더 볼 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퇴직할 즈음 늘상 있는 장관급 자리 권유까지 받았으나 그는 그저 초야에 묻혀 자신을 갈고닦기만을 원했다. 하지만 사무국에서 사직서와 함께 장관급인 국민고충처리위원장 취임 승낙서 두 장을 동시에 내밀 때 “위원장 안 맡겠다”고 하니 “그러면 퇴직도 안 된다”라는 등 웃지 못할 줄다리기가 벌어졌고, 퇴임식과 취임식이 하루 사이 ‘작전’과 같이 진행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그렇게 주 박사는 30여년간의 검사직에서 물러났고, 당시 그가 후배 공직자들에게 남긴 말은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회자된다.

“여러분들이 저를 주독이라는 말로 별명을 부른 걸 알고 있습니다. 제 딴에 엄정 공평하게 정의를 실현하다 보니까 너무 과분한 별호를 붙여준 것 같아 민망하기가 그지없고 늘 송구스러웠는데, 이제 검찰을 떠나면서 이 주독이라는 별호를 여러분들한테 남기고 갑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김독’ ‘이독’ ‘박독’ ‘최독’이 되십시오. 한 인간으로선 부족하더라도 검사로서는 언제나 ‘정기당당(正氣堂堂)’ 하십시오.”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232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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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최혜인 기자] “제가 한국 나이로 70이 다돼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20년 전에도 사오정(45세가 정년)이니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있으면 도둑)니 할 정도로 먹고살기 힘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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